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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타케 신부

성유스티노신학교 3대 교장
에밀 타케 신부

왕벚나무 자생지가
제주도임을 최초로 밝히다

구가톨릭대학교의 모태인 성유스티노신학교 3대 교장을 역임한 파리외방전교회 에밀타케 신부(Emile Taquet, 한국명 엄택기, 1873~1952)는 일본의 국화(國花)인 왕벚나무 표본을 채집하여 당시 벚나무 분류의 권위자인 독일 베를린대학의 쾨네(Köhne) 박사에게 보냄으로써 제주도가 왕벚나무의 자생지임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에밀 타케 신부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1897년 24살 때 사제 서품을 받고 1898년 서울에 온 뒤, 50여 년 동안 제주도, 대구, 밀양, 김해, 진주, 마산 등에서 사목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식물의 표본을 채집해 학명을 짓고 유럽 학계에 알림으로써 한국 식물분류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특히 1908년 제주 관음사 경내에서 왕벚나무를 발견하여 유럽 학계에 그 표본을 보고함으로써, 일본으로 잘못 알려진 왕벚나무 원산지가 한국이란 사실을 입증하였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안에 있는 왕벚나무 세 그루가 제주도 왕벚나무 자생지의 나무와 유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에밀 타케 신부가 성유스티노신학교 교장으로 재임(1922~1940) 하며 제주도에서 왕벚나무를 가져와 심었다는 기록을 입증한다.

성유스티노 신학교

1919년 3월 5일
성유스티노
신학교 학생들이

대구경북 최초의 일제항거
만세운동을 시작하다

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최초로 일제에 항거하는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3월 8일 대구 개신교 학교 주축의 독립만세 운동(대구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은 1919년 3월 5일 저녁 운동장에서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드망즈 주교는 이때의 상황을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전 황제의 장례식을 계기로 서울과 다른 곳에서 조선독립을 위한 시위를 했다. 대구 신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흥분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저께 저녁에 운동장에서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는데, 교장은 그것을 그만두게 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후 화들이 나 있으며, 아마도 성소를 잃는 학생들이 나올 것이다."

신학생들은 윌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낼 것과 3월 9일 오후 2시에 대구 약전골목에서 있을 대구의 만세운동에 가담하기로 결정하였다. 김구정 신학생은 독립선언문 복사와 유인물 프린트를, 서정도 신학생은 태극기를 만들기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샤르즈뵈프 교장신부에게 알려져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제작된 유인물과 태극기는 모두 교장실로 압수되어 버렸다.

4월 3일 다시 소요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곧 진정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이러한 학생들의 움직임에 대해 샤르즈뵈프 교장신부에게 조그마한 행동이라도 다시 일어나면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것을 지시했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가 관할하고 있던 한국 교회는 일제가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내세운 정교분리의 원칙에 동조하였는데, 이는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또한 이들 외국인 선교사들은 민족운동인 3·1운동을 정치 문제로 해석했고, 신자들에게 정치 문제에 대해 관여하지 않도록 가르쳤으므로 대부분의 신자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 「성유스티노신학교 1914-1945」 173~175쪽 부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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